일기자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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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맛질 박씨가 일기

예천 맛질의 함양박씨가 인물들이 1834년부터 1949년까지 대대로 쓴 생활일기 및 가계출납부 59책.

목록


순번 자료명 수록시기 책수 비고
1 대택일기(大宅日記) 1869∼1933 13朴義哲(1839∼1908)
朴尋洙(1869∼1933)
2 대택방계일기(大宅傍系日記) 1897∼1950 10
(11)
朴祖洙(1868∼1942)
朴榮普(1888∼1952)
마지막 1책 일실
3 소택일기(小宅日記) 1834∼1949 20朴得寧(1808∼1886)
朴周大(1836∼1912)
朴冕鎭(1862∼1928)
朴熙洙(1895∼1951)
4 저상일용(渚上日用) 1853∼1935 9朴得寧(1808∼1886)
朴周大(1836∼1912)
朴冕鎭(1862∼1928)
朴熙洙(1895∼1951)
5 전답안(田畓案) 1870년대 말경 1
6 춘곡추수기(春穀秋收記) 1831∼1925 2
7 지세수납부(地稅收納簿) 1922∼1932 4

일기 속 한 대목: 박주대 일기 서문

도광(道光) 14년(1834, 순조34) 갑오년은 즉 우리 순조(純祖) 임금의 마지막 해인데, 우리 집에서 시헌력(時憲曆: 당시 달력)에 따른 일기를 이때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이 해 1월 1일부터 지금 임금[고종]의 정묘년(1867, 고종4)까지는 나의 아버지[朴得寧, 1808∼1886]가 날마다 기록해 놓은 것인데, 갑오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는 아버지가 외지로 출타 중인 관계로 할아버지[朴漢光, 1770∼1834]가 보충해 기록하였다.
무진년(1868, 고종5) 이후로는 아버지가 병환으로 붓을 잡을 수가 없어 나[朴周大, 1836∼1912]에게 대신 일기를 쓰게 하였다. 병세가 간혹 조금 나아지면 직접 기록하기도 하셨지만, 신사년(1881, 고종18) 4월 4일 뒤로는 전적으로 내가 대신 썼다. 내가 병술년(1886, 고종23) 가을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일기를 계속 쓸 것을 당부 받는 비통함을 당하게 되니, 손 때 뭍은 아버지의 일기를 부여잡고 느꺼워 흐느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 선비로서 뜻을 이루어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면, 위로는 조정과 궁궐에서부터 아래로 변방과 해외에 이르기까지 업무를 처리하고, 한림원과 승정원 근무지에서 공적을 세운 자치고 매일 바로 대략적이라도 일기를 쓰지 않는 이는 없었다. 예컨대 구양수(歐陽脩)의 〈내제집(內制集)〉에는 시정기(時政記)와 일력(日曆)에서 취한 내용들이 있기 때문에 후대에 살펴보고 신뢰하기에 충분하다. 만일 그렇지 못하였다면 산림에 은거하는 자일뿐이다. 산림에 거처하면서도 세상을 구휼하는 자가 있으니, 공자(孔子)가 말한 “효도하고 우애하는 이것 또한 정사(政事)이다.”라는 것이다.
기록한 내용들은 일상의 행동거지를 벗어나지 않되 날씨의 맑고 흐림, 농사의 풍흉(豊凶), 집안의 출입, 손님의 접대와 농사일에 대한 경작과 수확, 예의(禮儀)에 관련된 길흉과 변통 그리고 이웃 마을이나 시골·서울에서 서술할 만한 일과 조정·저자거리나 해변 마을에서 기록할 만한 소문 및 그밖에 직접 보고 들은 소소한 일들도 모두 실어 놓았다.
갑자년(1864, 고종1) 이후로는 나라에 일들이 많았는데, 조정의 글 가운데 서울과 지방에 반포된 것은 별도로 〈만록(漫錄)〉이라고 편집하였고, 전체적으로 의심 없이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은 곧바로 여기 일기에 썼다. 병자년(1876, 고종13)부터서 개화(開化)에 관한 말들이 있었는데, 임금이 계시는 곳 코앞에서 바다 건너 각 나라들이 서로 뒤얽히고 벼슬아치들이 몰려들어 뒤섞이다 보니, 중간에 경악스럽고 서글픈 일들이 상당히 많았다.
작년 갑오년(1894, 고종31)에 일본 군병들이 느닷없이 서울 안으로 들이닥쳤을 때, 청나라 장수가 군대를 철수시키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 을미년(1895, 고종32)에는 마침내 조선을 개국한 연도를 기원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다 점점 더 나아가 8월의 변고[을미사변]와 11월의 단발령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다.
우리나라 동방의 천년 문물이 장차 이로부터 쓸리듯이 없어질 것인가, 아니면 한 가닥 양(陽)이 회복될 이치가 있어서 곤궁한 음(陰)의 상태에서 밑바닥에서부터 스스로 자라날 것인가?
우리 집은 100년 동안 가난이 극심하여 역서(曆書) 하나를 보지 못하였다. 올해도 그러하기에 아이들을 시켜 흰 종이를 묶은 다음 맨 앞에 12달, 일진(日辰) 및 24절기를 쓰게 하였다. 날마다 기록하는 일[일기]은 삼가 선대의 뜻을 이어받아 그만두지 말아서 후대 사람이 넘겨받아 변치 않는다면, 집안과 나라의 역사를 오히려 여기에 의지하여 그 대략을 살필 수 있게 될 것이다.
을미년(1895, 고종32) 12월 마지막 밤에 어버이의 상중인 박주대가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