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자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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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극선일기

조극선(趙克善: 1595∼1658)이 1609년부터 1635년까지 쓴 생활일기 11책. 인재일록(忍齋日錄)과 야곡일록(冶谷日錄)이라는 서명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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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자료명 수록시기 책수 비고
1 인재일록(忍齋日錄) 1 1609∼1615 1 청년기 생활일기
2 인재일록(忍齋日錄) 2 1616∼1617 1
3 인재일록(忍齋日錄) 3 1618∼1619 1
4 인재일록(忍齋日錄) 4 1620∼1621 1
5 인재일록(忍齋日錄) 5 1622∼1623 1
6 야곡일록(冶谷日錄) 1 1624∼1625 1 장년기 생활일기 및 사환일기
7 야곡일록(冶谷日錄) 2 1626∼1627 1
8 야곡일록(冶谷日錄) 3 1628∼1629 1
9 야곡일록(冶谷日錄) 4 1630∼1631 1
10 야곡일록(冶谷日錄) 5 1632∼1633 1
11 야곡일록(冶谷日錄) 6 1634∼1635 1

일기 속의 한 대목: 과거 시험장의 모습

2소(所) 동학(東學) 과장(科場: 과거 시험장)에 들어갔다. 【새벽에 극위(棘圍: 과장 주위에 친 울타리) 밖에 도착했다. 허형(許兄)은 정진원(鄭振遠)【우경(羽卿)의 자(字)이다.】과 함께 만나 기다릴 수 있었다. 이내 과장에 들어가니, 시관(試官)은 당상(堂上) 민몽룡(閔夢龍), 허균(許筠), 참시관(參試官)은 배대유(裵大維), 정준(鄭遵), 이잠(李潛), 감찰(監察)은 최진운(崔振雲)이었다. 지금 복시(覆試)에서는 모두 미봉(彌封)을 분명하게 하되 단지 도장만 찍고 “근봉(謹封)” 2자는 쓰지 않도록 계하(啓下)하였다. 의제(疑題)는 한 번 바꾸어 결정되었는데, 문제는 “공자가 말하길, ‘오직 어진 사람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어진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였다. 처음 문제를 현판에 내 걸었을 때, 무뢰한 무리들이 있었는데, 몰래 한 군사와 거짓으로 물을 전해 주는 척 하며 작은 종이 하나를 주었다. 여러 선비들이 보고는 감찰에게 고하니, 즉시 군사를 잡아 추문(推問)하였다. 서로 도운 것이 사유(使由: 통사와 이속)와 서리(書吏)에 까지 미쳤으니, 이내 사유와 서리를 결박하여 의금부로 내려 보냈다. 그 작은 종이를 준 응시자는 적발하지 못하였기에 문제를 바꾸었다. 더불어 만난 사람들은 이익겸(李益謙), 이유기(李裕基), 정이준(鄭以俊), 백이형(白而浻), 하용(河容)이었다. 더불어 함께 지은 사람들은 허형, 정진원 및 전탁영(田擢英)이었다. 전탁영은 허형과 아는 사이였다. 정오 무렵부터 비가 내릴 조짐이 있었다. 때때로 비가 뿌려 사람들이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다투어 들어갔지만 비는 곧 그쳤다. 시관이 금지하였지만 출입이 정해지지 않아 소란하게 서로 다투었다. 우리들은 애초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어둑해질 때 비가 이내 크게 쏟아졌다. 나는 명지(名紙)에 겨우 몇 줄 썼을 따름인데, 들어갈 곳이 없어 종이를 싸 들고는 어쩔 줄을 몰랐다. 속절없이 비를 맞고 있는데 마침 서재에 시권(試券: 답안지)을 제출하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 곧장 그 곳에 들어갔다. 허형은 이미 글씨를 잘 쓰는 자에게 손을 바꾸어 베끼게 하여 진원과 먼저 제출하고 나갔다. 전탁영은 정신없던 와중에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나의 책 보따리는 허형이 가지고 나가버렸다. 나 홀로 의지할 곳 없이 외로이 다른 사람의 불빛을 빌리고 다른 사람의 먹물을 얻어 다시 장소를 옮겨서 쓰기를 마치고 제출하였다. 과장에서의 고초가 이미 입에서 신물이 날 지경이니, 사람들의 명리(名利)에 현혹됨이 가히 비루하다고 할 만하다. 부족한 재주로 과거에 응시한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과장을 나와서 돌아왔다. 이 때 긴 큰길과 수표(水漂)에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밝았다. 아! 근래 과거가 매우 불공정하니, 아마도 하늘이 악덕을 싫어하여 비를 내려 씻어낸 것이리라. 어찌 유독 양일간 과장에 비를 내렸겠는가. 제생원동(濟生院洞)에 돌아가 묵었다. 내가 나올 때 수십명이 남아 있었는데 길에서 인정종(人定鍾) 소리를 들었다.】 저녁에 비가 내렸다. (광해군 10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