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익(1868∼1931)이 광무 1년(1897) 1월 1일부터 9월 19일까지 쓴 일기이다. 매일 매일이 아니라 특정한 날짜만 기록하였기 때문에 분량이 많지 않다. 1월과 2월은 자세한 반면 그 이후는 소략하다. 날씨, 농사관계, 교유관계 등을 기록하였다. 당시 임실군수로 재직중이던 아버지 朴始淳(1848∼1907)의 생일을 맞아 임실관아로 찾아간 여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흥미롭다.
박동익은 박시순의 맏아들로 再從伯 朴奎淳(1825∼1867)의 양자가 되었다. 平山에서 출생하여 1905년경 생부 박시순을 따라 부여 은산면 가곡리로 이주하였다. 동익은 咸陽朴氏 九堂公派 종손이다. 구당공파는 朴世榮(1508∼1552)을 파조로 하는 가계로, 그와 형제들이 모두 현달한데다가 아들 朴大立(1512∼1584)이 3도 감사를 역임하고 판서, 찬성을 거쳐 기로소에 들어감으로써 사환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이를 기반으로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남인 핵심가문으로 성장하였으나,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몰락한 남인들이 점차 서울에서 벗어나 경기도 일원으로 분산되는 경향과 궤를 같이 하여 18세기 중엽 경기 이천으로 이주하였다.
박시순은 1879년(고종16) 문과에 급제하여 서학교수, 우통례, 우승지, 면천군수, 임실군수, 장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재직 중에 남긴 관직일기 뿐만 아니라 민장치부류인 詞訟錄, 民訴冊, 공문모음집인 官旨冊, 郡報, 郡甘 그리고 유배일기 등 다양한 일기류와 공문서모음집을 남겼다. 현재 12종 30책이 전한다. 이 자료들은 아들 박동익 가에서 가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