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불일기(沔紱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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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일기
· 내용분류 개인-생활-일기
· 사부분류 사부-정서류-일기
· 시대분류 조선시대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생몰년 신분
박시순(朴始淳) 1848~1907 작성자

형태사항

· 크기(cm) 31.7 X 22.0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
· 재질 종이
· 표기문자 한자

비고

간행사항: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말 관인 박시순일기』,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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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박시순이 면천군수 재직시절 고종 31년(1894) 11월 12일부터 이듬해 7월 21일까지 쓴 관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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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朴始淳이 면천군수 재직시절 고종 31년(1894) 11월 12일부터 이듬해 7월 21일까지 쓴 관직일기
· 표제沔紱日記
· 내제
· 판심제
· 서근제
본 〈沔紱日記〉는 朴始淳(1848∼1907)이 沔川郡守로 재직할 당시인 고종 31년(1894) 11월 12일부터 이듬해 7월 21일까지 쓴 관직일기이다. 표지에 일기의 기간과 일수를 정확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아 후에 정리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沔紱’의 沔은 면천을 의미한다. 紱은 관인을 매다는 끈을 가리켜 벼슬, 사환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면불은 면천군수를 칭하는 말이다.
박시순이 면천군수에 임명된 것은 고종 31년(1894) 10월 13일의 일이다. 이보다 앞선 9월 22일 興陽縣監에 제수되었으나 곧이어 면천군수로 옮겨졌으므로, 그의 첫 번째 외직은 면천군수라 할 수 있다. 이듬해 6월 18일 다시 任實郡守에 임명되었다. 임실로 떠나기 전까지의 일기가 바로 본 자료이다.
일기 속에서 박시순은 정기적으로 文房의 현황을 확인하고 육방의 업무를 점검하는 한편, 수시로 南倉•북창•社倉을 순시하여 실태를 직접 확인하였다. 그리고 폭주하는 민원을 일일이 검토하여 합리적인 판결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함께 전하는 〈詞訟錄〉 3책을 통해 잘 드러난다. 〈사송록〉은 당시 관아에 제출된 민원의 내용과 그에 대한 자신의 판결을 수록한 책자로 이를 정리하고 보관했다는 사실에서 합리적인 민원해결에 대한 저자의 관심을 읽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순찰사•招討使와의 연락상도 자세하게 기록되었으며, 유생들에게 학업을 권장하는 기사도 자주 등장한다. 인근 고을 수령들과의 연계모습, 아전•면임•동임의 동향 기록도 혼란스러웠던 한말의 상황을 전하는 귀한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친지나 지인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도 종종 기록되어 있다. 總理大臣 金弘集, 度支大臣 魚允中, 外部大臣 金允植 등 조정의 거물급 인사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박시순의 교유관계와 인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박시순은 咸陽朴氏 九堂公派의 인물이다. 구당공파는 朴世榮(1508∼1552)을 파조로 하는 가계로, 그 형제들이 모두 현달하였고 그 아들 朴大立(1512∼1584)이 3도 감사를 역임하고 판서, 찬성을 거쳐 기로소에 들어감으로써 사환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를 기반으로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남인 핵심가문으로 성장하였으나,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몰락한 남인들이 점차 서울에서 벗어나 경기도 일원으로 분산되는 경향과 궤를 같이 하여 경기 이천으로 이주하였고, 1905년경에는 부여로 옮겨 정착하였다.
박시순은 1879년(고종16) 문과에 급제하여 서학교수, 우통례, 우승지, 면천군수, 임실군수, 장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재직 중에 남긴 관직일기 뿐만 아니라 민장치부류인 사송록, 民訴冊, 공문모음집인 官旨冊, 郡報, 郡甘 그리고 유배일기 등 다양한 일기류와 공문서모음집을 남겼다. 현재 12종 30책이 전한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말 관인 박시순일기』 2, 2003.
정순우•김학수, 「한말 관인 박시순일기의 내용과 성격」,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말 관인 박시순일기』, 1999.

집필자

권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