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 황윤석이 10세이던 1738년부터 작고하기 이틀 전인 1791년 4월 15일까지 54년간 작성한 일기이다. 종이 6천여 장, 글자수 5백여 만 자의 분량에 학습내용, 詩文, 論說, 紀行文 등을 소상히 적어 놓았다. 이를 日次, 月次, 年次 順으로 編冊하여 적당한 두께로 분철한 것으로 총 47책으로 되어 있다. 초년의 기록은 楷書나 行書로 되어 있으나 24~25세 무렵부터는 거의 草書로 기록하였고, 간혹 行狀, 碣名 등 신중함이 요구될 사항의 草稿와 시구만은 행서로 기록하였다. 헌 종이를 뒤집어서 쓰거나, 남은 자투리 종이를 이용하여 여백 없이 빽빽한 글씨로 가득 채운 면이 많다.
서술형태를 보면 날씨부터 쓰기 시작하여 기후의 변화, 농사의 豊凶과 때로는 地震, 彗星의 상황을 적고 일식, 월식의 시각도 그때마다 적고 있다. 특히 일식은 그 시각을 스스로 측정하여 그 측정치를 時憲曆, 回回曆과 대조하여 그 오차를 기록하고 있다. 그 밖에 변해가는 세태, 독서한 내용, 作文, 紀行, 학술적 논설, 비망록 등을 그의 예리한 관찰에 의해 기술하고 있다. 또한 구체적으로 조선후기 경제생활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도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물가동향이나 농사 점검, 산림의 확보, 사당의 보수 감독, 특수물자 구입 등의 내용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여행경비와 사용처, 서울 체류동안의 경제생활, 일용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경우에는 그 가격과 품질, 분량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지명은 한자명에 한글명, 舊名이 병기되어 있으며, 그 이름이 유래된 전설도 적혀있는 경우가 있다. 또 여행 시 점심을 먹은 곳과 숙박한 곳, 찾아온 사람들까지도 빠짐없이 일일이 기록하고 있다.
본 일기에는 이러한 향촌에서의 일상 생활기록과 함께 그의 문집이나 여타 자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선비들의 세세한 관행과 생활상도 기록돼 있다. 예컨대 그가 官人이 되고자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는 과정이나 실제 벼슬살이를 하며 자신이 목격하거나 지인들로부터 들은 傳聞, 공문서인 朝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정보를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또 그는 그렇게 수집된 정보를 요령 있게 정리하고 간간히 자신의 견해를 붙인 해설을 달아놓음으로써 비록 일기 형식이지만 당대의 분위기와 상황을 살피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저자는 성리학의 해박한 지식과 박학적 학문 경향으로 다양한 관심 영역을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여 그 기록을 모두 『이재난고』에 남겨 놓았다. 이러한 기록방식은 시간과 수치, 관련 인물 같은 당시로서는 중요하지 않았을 사항들까지 상세하고 치밀하게 기록하여 부족한 생활 문화사의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