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속보』(K2-1164)는 宗正院에서 간행된 3권 3책으로 된 금속활자본 보첩이다. 간행 시기는 1902년(광무 6)이다. 이 책은 世宗大王의 자손록으로 永豊君派譜와 寧海君派譜가 합책되어 있다. 책의 구성은 범례와 譜圖로 이루어져 있다.
永豊君 李瑔은 세종대왕의 8남으로 惠嬪 陽氏의 소생이다. 영풍군 이전은 1434년(세종 16)에 태어나 7세가 되던 1441년(세종 23)에 영풍군으로 봉군되었다. 영풍군 이전은 세조가 즉위한 후 금성대군, 그의 어머니인 혜빈 양씨와 더불어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어머니인 혜빈 양씨는 청풍으로, 영풍군 이전은 예안으로 배소가 정해졌다. 그러나 영풍군 이전은 다시 安城으로 옮겨졌다가, 任實로 移配되었으나, 언제 사망했는지 알 수 없다. 숙종대에 사육신의 신원이 회복되고,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어 1712년(숙종 38)에 혜빈 양씨와 영풍군 이전의 작호도 회복되었다. 또한 1791년(정조 15) 정조가 단종의 묘인 장릉에 배식단을 건립하였는데, 영풍군 이전도 여기에 배향되었다.
영풍군 이전은 박팽손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실록에 의거하면, 영풍군이 반역죄를 입고 유배될 당시 어린 아들이 있었고, 配所에서도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딸 李召史에게 屬公奴婢 20口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2남 1녀를 두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선원록』에는 두 아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萬戶 李陽孫에게 시집간 딸과 그의 후손들만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숙종대에 작호가 회복된 영풍군은 후사가 없었다. 1743년(영조 19) 좌의정 宋寅明이 영조에게 영풍군의 후사를 정해주도록 청하였다. 영조의 특명에 의해서 세종 2남인 桂陽君의 10대손인 李正華를 繼後로 정하였다. 이정화의 생부는 李㝡英으로 1708년(숙종 34) 진사시에 입격하고, 1712년(숙종 38) 문과에 급제하여 校理를 지낸 인물이다. 파보에는 영풍군 이전의 딸은 등재되어 있지 않고, 繼後 李正華와 그의 후손들만이 기재되어 있다.
寧海君 李瑭(初名 李璋)은 세종의 9남으로 愼嬪 金氏의 소생이다. 영해군 이당은 1435년(세종 17)에 태어나 7세가 되던 1442년(세종 24)에 영해군으로 붕군되었고, 1477년(성종 8) 43세로 사망하였다. 영해군의 시호는 安悼이다. 영해군 이당은 贈贊成 申允童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永春君 李仁, 吉安都正 李義, 舍人 朴承爚에게 시집간 딸 등 2남 1녀를 두었다. 파보에는 영춘군 이인, 길안도정 이의 이하 17세손까지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