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正院에서 간행한 2권 2책의 금속활자본 보첩이다. 간행 연도는 1902년(광무 6)이다. 이 책은 세종대왕의 자손록으로 錦城大君派譜이며, 금성대군 이하 18세까지 수록되어 있다. 책의 체재는 범례와 파보로 구성되어 있다. 파보는 6단 횡분식이며, 기재사항은 봉작·관직·명·시호·생몰일·사적·저술·墓地·행장 및 묘비 등의 찬술자 등이다.
금성대군 李瑜는 세종의 6남이다. 昭憲王后 沈氏에게서 출생하였다. 1433년(세종 15) 1월 19일 금성대군으로 봉해졌다. 1437년(세종 19) 2월 16일 全州 崔氏 左贊成 贈左議政 士康의 딸과 혼인하였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영월로 遜位되고, 瑜는 順興府에 안치되었는데 순흥부사 李甫欽 등과 함께 상왕의 복위을 꾀하다 발각되어 賜死되었다. 1738년(영조 14) 復爵되었다. 1739년(영조 15) 5월 13일 시호를 貞愍으로 내렸다. 1791년(정조 15) 단종의 능인 莊陵에 배식단을 세우고 安平大君 李瑢, 和義君 李瓔, 漢南君 李어{玉+於}, 永豊君 李瑔 등 31인과 함께 추향되었다.
금성대군은 최씨 사이에 咸從君 孟漢을 두었다. 그리고 서자 銅을 두었다. 함종군 맹한은 1455년(세조 1) 출생하였다. 금성대군의 죄에 연좌되어 淸州에 안치되었다. 1529년(중종 24) 졸하였다. 사후에 昭德大夫를 받았다. 함종군 맹한은 東平君 連長을 두었다. 銅은 忠州에 定屬되어 관비에게 장가들어 {金+叱}丁, 鐵丁, 銀丁 등 3남을 두었다. 이들 4부자는 1872년(고종 9) 특명으로 昭義大夫 戶曹參判 知宗正卿을 증직 받았다. 따라서 금성대군파보는 東平君 連長, {金+叱}丁, 鐵丁, 銀丁 등의 후손을 중심으로 파보가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