璿源續譜-世宗大王子孫錄(密城君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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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형식분류 고서-족보
· 내용분류 사회-가족/친족-족보
· 사부분류 사부-전기류-선원보-속보(續譜)
· 목차분류 왕대-세종-밀성군파(密城君派)

기관분류기호

· 청구기호 K2-1119
· 마이크로필름 MF35-002003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생몰년 신분
편자 이중범(李重範)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璿源續譜 간행 종정원(宗正院)

형태사항

· 크기(cm) 34.3 X 22.9
· 판본 금속활자본(金屬活字本) 필서체철활자(筆書體鐵活字)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5권 5책
· 판식 四周單邊 半郭 25.4×18.3㎝, 有界, 世別6段, 10行23字 註雙行, 內向三葉花紋魚尾
· 재질 닥종이[楮紙]
· 표기문자 한자
· 인장 1 (봉모당인(奉謨堂印))

비고

同書 4部(K2-1119B, K2-1119C, K2-1119D)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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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표제世宗大王子孫錄(密城君派)
· 내제璿源續譜
· 판심제璿源續譜
· 서근제
『선원속보』(K2-1119)는 宗正院에서 간행된 5권 5책으로 된 금속활자본 보첩이다. 간행 시기는 1902년(광무 6)이다. 이 책은 세종대왕의 자손록으로 密城君派譜이며, 책의 구성은 범례와 譜圖로 이루어져 있다.
밀성군 李琛세종의 5남으로 1430년(세종 12)에 愼嬪 金氏에게서 출생하였고, 1442년(세종 24) 밀성군으로 봉해졌다. 세조는 밀성군이 언행을 삼가고 우애가 돈독함을 가상히 여겨서 1467년(세조 13) 兼五衛都摠管을 삼았으며, 역대 왕들이 특별히 총애하여 사옹원·문소전·종부시 제조를 역임하였다. 또한 1468년(예종 즉위년)에는 남이의 역모 사건으로 익대공신 2등에,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1479년(성종 10)에 밀성군이 사망하자 輟朝하고 弔祭·禮葬을 전례대로 행하고, 諡號는 章孝로 하였는데, 1782년(정조 13) 孝僖로 개정되었다.
밀성군은 1444년(세종 26)에 豊儲倉 使 閔承序의 딸에게 장가들어 靈山君 李誡, 春城君 李譡, 遂安君 李상{言+賞}, 石陽君 李격{言+鬲}河漢文에게 출가한 딸, 安友夏에게 출가한 딸 등 4남 2녀를 두었다. 그 중 둘째 아들 춘성군 이당태조의 8자인 宜安大君 李芳碩의 계후로, 셋째 아들 수안군 이상밀성군의 동생인 壽春君 李玹의 계후로 出系하였고, 석양군 이격은 일찍 죽었다. 따라서 밀성군파보에는 밀성군의 맏아들 영산군 이계 이하 17세가 수록되어 있다. 영산군의 후손들은 다수가 과거에 급제하였고, 파보의 책수로 보아도 가문이 번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864년(고종 1) 밀성군의 13세손인 李秉哲이 진사시에 입격하자 고종이 가상하게 여겨 英陵의 參奉으로 제수하기도 하였다.
의안대군 이방석의 계후는 1437년(세종 17) 세종이 특명으로 금성대군 李瑜로 정하였다. 그러나 금성대군 이유가 세조대에 賜死됨으로써 繼後를 바꿀 수 밖에 없었던 것같다. 언제 밀성군의 둘째아들 춘성군 이당이 계후로 정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실록에 의하면 이미 성종대에 춘성군 이당이 계후로서 제사를 모셨다. 그러나 1864년(고종 1) 춘성군 이당의 후손인 李枋 등이 연명으로 춘성군의안대군의 계후가 된 것은 昭穆에 어긋난다는 상소를 올렸다. 즉 춘성군 이당의안대군의 再從曾孫이므로 奉祀는 할 수 있다고 하나, 繼子는 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고종은 이에 대하여 『선원계보기략』의 系圖 수정을 허락한다고 윤허하였으나, 실제는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 『선원계보기략』이나 『선원속보』(K2-1119)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으며, 1872년·1899년의 繼子 수정 單子에도 논의가 없다.

참고문헌

『세종실록』
『세조실록』
『예종실록』
『성종실록』
『정조실록』

집필자

원창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