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7년 영녕전 수개도감 의궤(永寧殿修改都監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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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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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형식분류 고서-의궤
· 내용분류 국왕/왕실-의례-의궤
· 사부분류 사부-정서류-공영(工營)
· 시대분류 조선시대
· 주제분류 건축

기관분류기호

· 청구기호 K2-3572
· 마이크로필름 MF35-000550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편자 영녕전수개도감(永寧殿修改都監)

형태사항

· 크기(cm) 46 X 24.8
· 판본 원본(原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冊(181張)
· 판식 四周雙邊, 半郭 37.5×29.4cm, 烏絲欄, 半葉 12行 26字, 內向二葉花紋魚尾
· 재질 닥종이[楮紙]
· 표기문자 한자
· 인장 1 (貳品奉使之印)
· 인장 1 (茂朱赤裳史庫所藏 … 本)
· 인장 1 (李王家圖書之章)

비고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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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667년(현종 8) 宗廟 永寧殿의 改修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 표제
· 내제
· 판심제
[서지사항]
표제는 ‘永寧殿修改都監儀軌’이다. 서근제는 ‘永寧殿修理都監儀軌’이고, 옆에 冊次 ‘全’과 ‘顯宗’이 기록되어 있다. 표지 장황은 민무늬의 짙은 朱色 표지를 사용하였다. 서명은 표지에 직접 墨書하여 線裝하였다. 표지 우측에 ‘康熙六年(1667) 丁未七月 日’, ‘顯宗八年’이 필사되어 있다. 앞표지 내지에 ‘儀軌五件內 御覽一件 宗廟署一件 春秋館一件 赤裳山城一件 江華府一件’이 기록되어 있다. 본문의 판식은 四周雙邊에 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인 인찰공책지에 필사하였다. 字數는 12行 26字이다. 책 수는 1冊 181張이고, 본문의 종이는 壯紙를 사용하였다. 뒤표지 내지에 ‘大正七年(1918)十三月日改修’가 기록되어 있다. 인장은 앞표지 내지부터 매 면마다 ‘二品奉使之印’을 날인하였고, 제1면 우측 상단에 ‘李王家圖書之章’, 우측 하단에 ‘茂朱赤裳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을 날인하였다.
[체제 및 내용]
종묘 영녕전은 1421년(세종 3)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왕비의 신위를 봉안하기 위해 종묘에 건립한 제사공간이다. 임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광해군 즉위) 중건하였고, 그 후에도 1667년(현종 8)과 1836년(헌종 2)과 1870년(고종 7)에 각각 개수되었다.본서의 체제는 좌목, 啓辭, 移文, 甘結, 別單及分定, 役軍, 各所, 爐冶所, 별공작이며, 儀軌, 論賞이 부록되었다. 1666년(현종 7) 9월 20일 이조에서 작성한 좌목은 다음과 같다. 도제조는 영의정 鄭太和에서 우의정 鄭致和로 差代되었으며, 제조는 예조판서 洪重普, 병조판서 金佐明, 호조판서 金壽興, 이조판서 金壽恒이었고, 도청은 사복시정 李敏迪에서 홍문관 부응교 沈梓, 이부정랑 洪萬容으로 차례로 차대되었다가 부사과 李益昌이 최종적으로 일을 수행하였다. 또한 1소의 監造官은 참봉 李重蓋, 2소 감조관은 선공감 감역 趙汝耘, 3소 감조관은 종묘서 부봉사 崔渲에서 종묘서 봉사 崔碩儒로 체임되었다. 별공작 役官은 洪濟亨이며, 소원 李栢如, 尹聖和, 녹사 金逸男, 서리 廉祉翼, 吳大蕃 등 7명이고, 직고는 李仁伯, 사령은 秋應民 등 5명이었다.「계사」에 의하면, 1663년(현종 4) 3월 15일 병조판서 김좌명이 종묘 영녕전 동서 익실이 심하게 좁아 개건에 대한 의론이 있었으나 아직 거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아뢰어 그해 봄에 봉심하게 한 후 수개를 위한 길일을 택하도록 하였다. 이후 우의정 정유성이 개건은 중요한 일이니 ‘永寧殿修改都監’이라 칭하자고 제안하면서 도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현종이 영녕전 동서 익실이 좁고, 서익실 서북 귀퉁이의 柱礎와 堦石이 물러난 것에 대한 수개 공사를 할 것을 명하였다. 1663년 3월 15일 이조에서 도감의 좌목을 현종에게 올리고, 종묘 대문 밖 근처에 도감의 개설할 것을 보고하였다. 개수에 필요한 물품 별단은 강원도, 전라도, 경기도, 황해도, 강화 등지에서 올렸고, 재목과 잡물의 분정별단은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 강화 등지에서 분담하였다. 최종적으로 1667년(현종 8) 7월 6일 도감의 諸役을 이미 마치고 儀軌事目 依例에 磨鍊을 書入할 것을 계하하였다.「이문」은 영녕전 수개와 관련한 계하를 상고하여 각 도에 목재와 잡물을 보낼 것을 내용으로 한 1666년(현종 7) 10월 7일 이문을 비롯하여 사복시, 훈련원 등 각 관서와 주고받은 문서, 1667년 5월 10일 이조, 호조, 공조, 전설사, 제용감, 통례원 등에 5월 17일 영녕전 상량문 선독관과 집사 2명, 향로, 香榼 차비관을 미리 차출할 것과 이날 전내 배설은 당일 罷漏 시에 해당 관원이 모여 직접 진설하는 일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米布上下式에 의하면, 書員庫直, 使令, 匠人 등 각 역원과 승군에게 준 미포의 분급이 상세히 적혀 있어 영녕전 개수 시 인건비를 참조할 수 있다.「각소」는 주요 업무를 먼저 기록하였다. 1소는 木役, 破屋, 朱簾, 床卓, 鋪陳, 鳳雀扇, 靑紅蓋 등 浥和堂과 靈慶堂 거동 시의 排設을 맡았다. 2소는 浮石, 開基, 地正, 定礎, 土役, 方甎, 薄石, 修掃 등의 업무를 맡았고, 3소는 蓋瓦, 丹靑, 神輿, 腰輿, 龍亭, 儀註, 祭器庫, 典祀廳, 守僕房 등의 업무를 맡았다. 이어서 各所別로 座目·甘結·實入·工匠 등을 차례로 적고 맨 끝에 各色工匠秩을 두어 修改에 참여한 장인들을 일괄 정리하였다.다음으로 ‘爐冶所’와 ‘別工作’은 목차에는 있으나 실제 내용에는 누락되었다. 노야소에서는 개수에 소용되는 각종 철물을 제작하는 일을 맡았으며, 별공작에서는 각 소에서 필요로 하는 비품을 마련하는 일을 담당하였다.「도감의궤사목」에 의하면 의궤 5건 중 1건은 어람용이며, 나머지 4건은 종묘서, 춘추관, 적상산성, 강화부 등처에 분상하였다. 또한 화원 1인, 서사 4인, 서리 30인, 직고 1명, 사령 2명 등은 전례에 의거하여 호조와 병조에서 布로써 급료를 주었음을 알 수 있다.卷末에 都提調 1인, 提調 5인, 都廳 2인, 郎廳 3인, 監造官 3인, 監役官 1인 등 15인의 銜名手決이 있다.
[특성 및 가치]
본서는 적상산 사고에 분상된 의궤로 1667년(현종 8) 宗廟 永寧殿의 改修 과정에서 조정에서 오간 논의와 각 관청의 문서, 그리고 도감에 참여한 관리와 役員은 물론, 수리에 들어간 물품들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어람용 의궤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36년(현종 2) 작성된 『宗廟永寧殿增修都監儀軌』(K2-2189) 역시 장서각 소장본으로 종묘의 영녕전의 건물 수개와 그 규모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 함께 참조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동욱, 「朝鮮時代 宗廟 正殿 및 永寧殿의 건물 규모 변천」, 『文化財』 21, 1989.
李康根, 「朝鮮王朝의 神殿 宗廟」, 『美術史學硏究』 216, 한국미술사학회, 1997.

집필자

정은주